라벤나 총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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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벤나 총독부는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동로마 제국이 이탈리아에 설치한 행정 구역으로, 라벤나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해안 지역을 통치했다. 402년 서로마 제국이 수도를 라벤나로 옮긴 이후, 동고트 왕국과 동로마 제국이 라벤나를 수도로 삼았다.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이탈리아 재정복 이후 총독부가 설치되었으며, 롬바르드족의 침입으로 영토가 축소되는 가운데 로마 교황과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751년 롬바르드족에게 멸망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지배는 종식되었고, 이후 교황령이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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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벤나 - 라벤나 전투 (1512년)
라벤나 전투는 1512년 프랑스와 교황군 간에 벌어진 이탈리아 전쟁의 중요한 전투로, 프랑스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사령관 가스통 드 푸아의 전사로 인해 프랑스군이 이탈리아에서 철수하게 되었으며, 대포의 대량 사용과 중장기병의 쇠퇴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라벤나 총독부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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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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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라틴어) | Exarchatus Ravennatis |
공식 명칭 (그리스어) | Εξαρχάτον τής Ραβέννας (Exarcháton tḗs Ravénnas) |
이탈리아어 명칭 | Esarcato d'Italia |
유형 | 총독부 |
국가 | 동로마 제국 |
시대 | 초기 중세 |
수도 | 라벤나 |
역사 | |
시작 | 584년 |
시작 사건 | 총독부 설립 |
종료 | 751년 |
종료 사건 | 에우티키우스 사망 |
선행 사건 | 랑고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침공 |
선행 사건 시기 | 568년 |
이전 국가 | 프라이토리우스 관할 이탈리아 |
후계 국가 | 베네치아 공화국 랑고바르드 왕국 교황령 롱고바르디아 |
정치 | |
직책 | 총독 |
초대 총독 | 데키우스 |
초대 총독 재임 기간 | 584년–585년 |
마지막 총독 | 에우티키우스 |
마지막 총독 재임 기간 | 726년–751년 |
2. 배경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하면서 로마 제국은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분열되었다. 서로마 제국은 호노리우스가 통치하게 되었으며, 5세기에 걸쳐 야만족의 침략을 겪었다. 401년에는 서고트족의 왕 알라릭 1세가 아퀼레이아를 거쳐 밀라노를 포위했고, 호노리우스는 라벤나로 수도를 옮겼다.[1]
2. 1. 서로마 제국 멸망과 이탈리아 반도의 혼란
402년, 서로마 제국의 황제 호노리우스는 수도를 로마에서 라벤나로 옮겼다. 아드리아 해에 면한 좋은 항구가 있고, 육상으로는 늪으로 둘러싸여 방어에 유리했기 때문이다.[1]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오도아케르와 동고트 왕국을 세운 테오도리크 역시 라벤나를 수도로 삼았다.[1]고트 전쟁 중인 540년, 동로마 제국의 장군 벨리사리우스가 라벤나를 점령하고 이곳을 이탈리아 통치의 거점으로 삼았다.[6] 이 무렵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지배 체계는, 과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정비했고 오도아케르나 동고트인들도 이용했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한 도 제도였다.[6]
2. 2. 동고트 왕국의 성립과 몰락
476년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제국을 무너뜨리고 이탈리아를 장악하면서 라벤나는 그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오도아케르의 왕국은 오래가지 못했다. 493년 오도아케르는 동고트족의 왕 테오도리쿠스에게 패배했고, 테오도리쿠스는 동고트 왕국을 세워 이탈리아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동고트 왕국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지방 및 국가 조직을 유지했다.[3]2. 3.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이탈리아 재정복과 동로마 제국의 통치
6세기 중반,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는 서방, 특히 이탈리아 재정복을 위한 일련의 원정을 시작했다. 황제는 반도에서 동고트족과의 길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시작했고, 540년 고트족의 수도이자 관구의 중심지인 라벤나가 재정복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라벤나에 자체 관구를 임명했으며, 이 기나긴 원정은 552-554년 나르세스 장군의 결정적인 원정으로 끝을 맺었다.554년 8월 13일,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pragmatica sanctio pro petitione Vigilii''(교황 비길리우스의 요청에 대한 실용적 제재)를 반포하여 이탈리아 관구를 로마의 지배하에 두었다. 그러나 시칠리아와 달마티아는 이탈리아 관구에서 분리되었다. 시칠리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종속된 프라에토르가 통치하며 어떤 관구에도 속하지 않았고, 달마티아는 일리리쿰 관구에 통합되었다. 결과적으로 이탈리아 관구는 ''Provincia Italiae''라고도 불리며 대륙 및 반도 이탈리아(사르데냐와 코르시카는 유스티니아누스의 재정복 후 반달족에게 정복되어 아프리카 관구에 속함)로 축소되었다.
나르세스는 이탈리아에 남아 방어, 행정 및 재정 기구를 재편성했다. 관구 방어를 위해 네 개의 군사 사령부가 할당되었는데, 포룸 율리이, 트렌토, 마조레호와 코모 호수 지역, 코티아 및 그라아 알프스에 각각 설치되었다. 6세기와 7세기 동안 롬바르드족과 프랑크족의 위협이 커지고, 성상 파괴주의 황제와 라틴 신학의 중세적 발전에 의해 동서 기독교 간의 분열이 심화되었으며, 이는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사이의 격렬한 경쟁으로 이어져 총독의 입지는 더욱 불안정해졌다.
3. 라벤나 총독부의 성립과 발전
568년, 알보인이 이끄는 랑고바르드족이 북이탈리아를 침공하면서 동로마 제국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위기에 직면했다. 고트 전쟁으로 황폐해진 이 지역은 랑고바르드족의 침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572년 파비아를 함락당하며 랑고바르드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5] 랑고바르드족은 중앙 이탈리아와 남부 이탈리아까지 세력을 확장하여 스폴레토 공국과 베네벤토 공국을 세웠다.[6]
유스티누스 2세 황제는 랑고바르드족의 분열을 틈타 반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7] 발칸 반도의 혼란으로 인해 이탈리아에 집중할 수 없었다. 결국 580년 티베리우스 2세는 이탈리아 영토를 5개의 주(에파르키에스)로 재편했고, 라벤나에는 총독부를 설치하여 내정, 군사, 교회 관리 권한을 부여했다.[8]
이로써 라벤나 총독부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황제를 대리하여 아펜니노 산맥 동쪽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랑고바르드족의 세력 확장은 계속되었고, 동로마 제국의 영토는 해안 도시들로 축소되었다. 로마에서는 교황이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고, 총독과 교황은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대립하는 관계를 유지했다.
총독부는 중앙 집권적 통치에서 봉건제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보였다. 총독을 비롯한 제국 관리들은 점차 지역 지배 세력으로 변모했고, 랑고바르드족에 맞서기 위해 조직된 지역 민병대는 점차 독립적인 군사력으로 성장하여 중세 이탈리아 도시 국가 시민군의 선구가 되었다.
3. 1. 롬바르드족의 침입과 동로마 제국의 대응
568년, 알보인 국왕 휘하의 롬바르드족은 다른 게르만 동맹과 함께 북부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이 지역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완전히 평정되었으며, 오랜 고트 전쟁 동안 큰 피해를 입었다. 현지 비잔틴군은 약했고, 569년 롬바르드족은 여러 도시를 점령한 후 밀라노를 정복했다. 그들은 572년에 3년간의 포위 공격 끝에 파비아를 점령하고 수도로 삼았다.[1] 그 후 몇 년 동안, 그들은 토스카나를 점령했다. 파로알드와 조토가 이끈 다른 군사 작전은 중부 이탈리아와 남부 이탈리아까지 침투하여 스폴레토 공국과 베네벤토 공국을 세웠다.[2] 그러나 573년 알보인의 암살 이후, 롬바르드족은 여러 자치 공국("공작 통치")으로 분열되었다.황제 유스티누스 2세는 576년 롬바르드족의 분열을 이용하여 사위 바두아리우스를 이탈리아로 보냈다. 그러나 그는 전투에서 패배하고 죽임을 당했고,[3] 발칸 반도와 동방에서의 지속적인 위기로 인해 또 다른 제국의 재정복 노력은 불가능했다. 롬바르드족의 침략으로 인해 로마의 영토는 여러 고립된 지역으로 분열되었다. 580년, 황제 티베리우스 2세는 이들을 5개의 주(eparchies)로 재편성했는데, 이들은 라벤나 주변의 북동부 이탈리아의 ''안노나리아'', 칼라브리아, 캄파니아, 에밀리아와 로마 (''우르스'')시 주변의 ''우르비카리아''였다. 6세기 말에는 새로운 권력 질서가 안정된 패턴으로 정착되었다. 엑사르크에 의해 통치되는 라벤나는 도시, 항구, 그리고 포 강까지 북쪽으로, 마레키아 강까지 남쪽으로 제한되었으며, 엑사르크는 그의 교회 직 외에도 민사 및 군사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포 강은 명목상 황제의 봉사를 받는 베네치아 공작의 영토와 경계를 이루었고, 그 너머에는 아드리아 해에 있는 펜타폴리스 공국이 있었으며, 여기에도 명목상 동방 황제를 대표하는 공작이 있었다.[4]
3. 2. 라벤나 총독부의 설치와 역할
568년, 알보인이 이끄는 랑고바르드족과 그 동맹 부족 집단이 북이탈리아를 침공했다. 이 지역은 554년까지 20년 가까이 이어진 고트 전쟁으로 황폐해졌고, 동로마 제국의 저항은 미약했다. 569년, 랑고바르드족은 메디오라눔(밀라노)을 점령했고, 3년간의 포위 공격 끝에 572년 파비아를 함락하여 랑고바르드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5]。 이후 파로알드 1세나 조토 등이 중앙 이탈리아와 남부 이탈리아를 정복하고, 각각 스폴레토 공국과 베네벤토 공국을 세웠다[6]。 그러나 572년 알보인과 574년 그의 후계자 클레프가 암살당하고 랑고바르드 왕국이 공작 시대에 들어가면서, 랑고바르드족의 기세는 일시적으로 약화되었다.이러한 상황을 틈타 황제 유스티누스 2세는 사위 바두아리우스를 이탈리아에 파견했지만, 바두아리우스는 랑고바르드족에게 패배하여 전사했다[7]。 발칸 반도 또한 혼란스러웠기에, 동로마 제국은 이탈리아에 집중할 수 없었다. 랑고바르드족에게 잠식당한 제국령 이탈리아는 월경지가 되었고, 580년 티베리우스 2세는 이탈리아 대부분을 상실했음을 인정하고 영토를 5개의 주(에파르키에스)로 나누었다. 이들은 안노나리아(라벤나), 칼라브리아, 캄파니아, 에밀리아, 우르비카리아(로마 주변)였다. 6세기 말, 이 5개 주에는 각각 새로운 지배 체제가 성립되었다. 라벤나에는 총독부가 설치되었고, 총독에게는 라벤나 시, 항구, 그 주변(북쪽은 포강으로 베네치아 공국과 접하고, 남쪽은 마레키아 강으로 펜타폴리스 공국과 접하는 영역)에 대한 내정, 군사, 교회 관리 권한이 주어졌다[8]。
랑고바르드족이 내륙을 장악했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의 세력은 여러 공국(로마 공국, 베네치아 공국, 칼라브리아 공국, 나폴리 공국, 페루자 공국, 펜타폴리스 공국, 테마 루카니아 등)이 장악한 해안 도시로 제한되었다. 라벤나 총독은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황제의 대리인이었고, 직접적인 통치 영역은 아펜니노 산맥 동쪽이었다. 그 외의 제국 영토는 두쿠스나 마기스트리 밀리툼이 더 강한 권위를 가졌다. 명목상으로는 이탈리아 반도 전체가 라벤나 총독부의 관할이었다. 시칠리아 섬은 독자적인 정부가 설치되었고, 코르시카 섬과 사르데냐 섬은 아프리카 총독부가 통괄했다.
파비아를 수도로 한 랑고바르드 왕국은 피에몬테, 롬바르디아, 베네치아 본토(베네치아 섬을 제외한 대륙부), 토스카나, 캄파니아 내륙부를 장악했고, 640년에는 리구리아에서도 제국 세력을 몰아냈다. 나폴리나 칼라브리아의 제국 영토도 베네벤토 공국에 의해 조금씩 줄어들었고, 로마에서는 교황이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교황과 라벤나 총독은 대립과 협력을 반복했다. 교황은 로마에서 제국에 대한 불만을 완화하는 데 이용되었지만, 교황과 로마 원로원은 총독을 외부 개입자로 여겨 소외시키기도 했다.
총독부의 역사는 황제에 의한 중앙 집권적 통치에서 유럽 봉건제로의 과도기였다. 콘스탄티노플 황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총독 등 중앙 관리는 점차 세습적, 혈족적이 되었고, 지역 토지 소유자, 지배자로 변질되었다. 또한 랑고바르드족에 대한 방어를 위해 처음에는 정규 제국군에 소속되었던 영내 징집병이 점차 독립적인 상비군이 되었다. 이러한 군대는 라벤나 외에도 이탈리아 각지의 제국 영토 도시에서 나타났으며, 중세 이탈리아 도시 국가 시민군의 선구가 되었다.
3. 3. 라벤나 총독부의 전성기와 문화 발전
랑고바르드족이 내륙을 장악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세력은 로마 공국, 베네치아 공국, 칼라브리아 공국, 나폴리 공국 등 해안 도시로 제한되었다. 라벤나 총독은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황제의 대리인으로서 아펜니노 산맥 동쪽을 통치했다. 다른 제국 영토는 두쿠스나 마기스트리 밀리툼이 더 강한 권위를 가졌다. 명목상으로는 이탈리아 반도 전체가 라벤나 총독부 관할이었지만, 시칠리아 섬은 독자적인 정부가 있었고, 코르시카 섬과 사르데냐 섬은 아프리카 총독부가 통치했다.[1]파비아를 수도로 한 랑고바르드 왕국은 피에몬테, 롬바르디아, 베네치아 본토(베네치아 섬 제외), 토스카나, 캄파니아 내륙부를 장악했고, 640년에는 리구리아에서 제국 세력을 몰아냈다. 나폴리나 칼라브리아의 제국 영토도 베네벤토 공국에 의해 줄어들었고, 로마에서는 교황이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교황과 라벤나 총독은 대립과 협력을 반복했다. 교황은 로마에서 제국에 대한 불만을 완화하는 데 이용되었지만, 교황과 로마 원로원은 총독을 외부 개입자로 여겼다.[1]
총독부의 역사는 황제에 의한 중앙 집권적 통치에서 유럽 봉건제로의 과도기였다. 콘스탄티노플 황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총독 등 중앙 관리는 점차 세습적, 혈족적이 되었고, 지역의 토지 소유자, 지배자로 변해갔다. 랑고바르드족에 대한 방위를 위해 처음에는 정규 제국군에 부속되었던 영내 징집병이 점차 중앙에서 독립한 상비군이 되었다. 이 군대는 라벤나 외에도 이탈리아 각지의 제국 영토 도시에서 나타났으며, 중세 이탈리아 도시 국가 시민군의 선구가 되었다.[1]
4. 라벤나 총독부의 쇠퇴와 멸망
6세기와 7세기에 걸쳐 랑고바르드족과 프랑크족의 위협이 커지고, 성상 파괴 운동을 둘러싼 로마 교황과 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라벤나 총독부의 입지는 더욱 불안정해졌다.
황제 레오 3세는 라벤나 총독 파울루스에게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를 살해하거나 투옥하라고 명령했지만, 파울루스는 이에 실패하고 727년 그레고리우스 2세가 선동한 반란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유티키우스가 뒤를 이었지만, 751년 랑고바르드 왕 아이스톨포에게 멸망하여 라벤나 총독부는 소멸했다.
752년, 펜타폴리스 공작령으로 알려진 총독령의 북동부 지역은 롬바르드족의 아이스툴프 왕에게 정복되었다. 4년 후, 프랑크족이 롬바르드족을 몰아낸 후, 교황 스테파노 2세가 해당 영토를 주장했다. 롬바르드족에 대한 군사 작전에서 교황의 동맹국이었던 프랑크 왕국의 피핀은 정복한 땅을 교황령에 기증했고, 이는 피핀의 아들 샤를마뉴가 774년에 확정하면서 교황의 세속적 권력의 시작을 알리는 성 베드로의 유산이 되었다. 그러나 이전 총독령 내의 대주교는 지역 세속 권력과 독립에 대한 전통을 발전시켰고, 이는 권력의 분산 및 지역화에 기여했다.
총독부 멸망 후, 나폴리, 칼라브리아, 풀리아의 제국 영토를 포함한 총독령의 남부 지역은 이탈리아의 카테파나테로 재편성되어 바리에 본부를 두었다. 이 영토는 847년 사라센 베르베르족에게 빼앗겼지만 871년에 되찾았다. 나중에 시칠리아가 아랍인에게 정복된 후, 잔존 세력은 새로 설립된 군사/행정 구역인 칼라브리아와 롬바르디아로 편입되었다. 아드리아 해 북단의 이스트리아는 달마티아에 부속되었다.[1]
4. 1. 롬바르드족의 지속적인 침입과 영토 축소
랑고바르드족이 이탈리아 내륙을 장악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세력은 해안 도시들로 제한되었다. 라벤나 총독은 황제의 대리인으로서 아펜니노 산맥 동쪽을 통치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두쿠스나 마기스트리 밀리툼이 더 큰 권한을 가졌다. 명목상으로는 이탈리아 반도 전체가 라벤나 총독부 관할이었지만, 시칠리아 섬은 자체 정부가 있었고, 코르시카 섬과 사르데냐 섬은 아프리카 총독부가 통치했다.파비아를 수도로 한 랑고바르드 왕국은 피에몬테, 롬바르디아, 베네치아 본토(베네치아 섬 제외), 토스카나, 캄파니아 내륙을 장악했고, 640년에는 리구리아에서 제국 세력을 몰아냈다. 나폴리와 칼라브리아의 제국 영토도 베네벤토 공국에 의해 축소되었고, 로마에서는 교황이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교황과 라벤나 총독은 대립과 협력을 반복했는데, 교황은 로마에서 제국에 대한 불만을 완화하는 데 이용되었지만, 교황과 로마 원로원은 총독을 외부 개입자로 여겼다.
총독부의 역사는 황제 중심 통치에서 유럽 봉건제로의 과도기였다. 황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총독 등 중앙 관리는 점차 세습적, 혈족적이 되어 지역 토지 소유자, 지배자로 변해갔다. 랑고바르드족 방어를 위해 징집된 병사들은 점차 중앙에서 독립된 상비군이 되었고, 이는 중세 이탈리아 도시 국가 시민군의 선구가 되었다.
6세기부터 7세기에 걸쳐 랑고바르드족과 프랑크족의 위협, 성상 파괴 운동을 둘러싼 로마 교황,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대립 심화로 라벤나 총독부의 입지는 불안정해졌다. 황제 레오 3세는 라벤나 총독 파울루스에게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를 살해 또는 투옥하라고 명령했지만, 파울루스는 실패하고 727년 반란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에우티키우스가 뒤를 이었지만, 751년 랑고바르드 왕 아이스톨포에게 멸망하여 라벤나 총독부는 소멸했다. 이는 로마 교황의 자립을 의미했다. 총독부 멸망 직전인 740년, 라벤나 총독부의 지배 지역은 이스트리아, 베네치아, 페라라, 라벤나, 펜타폴리스, 페루자였다.
교황 스테파노 2세의 요청으로 프랑크 왕 피핀 3세는 756년에 랑고바르드 왕국을 격파하고 구 라벤나 총독령을 교황에게 기증했다. 이 피핀의 기증은 774년 카롤루스 대제에 의해 확대되어 교황령이 성립되었다. 단, 라벤나 대주교는 동로마 제국 이래의 특권과 독립 교회 지위를 유지했다.
랑고바르드족에 의한 라벤나 총독부 멸망, 교황의 동로마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으로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에 획득된 동로마 영토 이탈리아는 거의 상실되었다. 총독부 멸망 후, 남부 이탈리아(마그나 그라에키아)의 동로마 제국 영토는 바리의 카테파노 통괄 하에 들어갔다. 9세기에 시칠리아가 아랍인에게 정복되자, 이 지역은 테마 칼라브리아와 테마 롬바르디아로 재편성되었고, 아드리아 해 북안의 이스트리아는 달마티아에 편입되었다.
4. 2. 성상 파괴 논쟁과 동로마 제국과의 갈등
6세기부터 7세기에 걸쳐 랑고바르드족과 프랑크족의 위협이 증가하고, 성상 파괴 운동을 둘러싼 로마 교황과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대립이 깊어지는 가운데, 그 사이에 있던 라벤나 총독부의 입장은 더욱 불안정해졌다. 황제 레오 3세는 라벤나 총독 파울루스에게 중세에 저항하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를 살해하거나 투옥하라고 명령했지만, 파울루스는 이에 실패하고 727년에 그레고리우스 2세가 선동한 반란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에우티키우스가 뒤를 이었지만, 751년 랑고바르드 왕 아이스톨포에게 멸망하여 라벤나 총독부는 소멸했다. 이는 동시에, 황제와의 대립을 심화시키고 있던 로마 교황의 자립을 의미했다.4. 3. 라벤나 총독부의 멸망과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지배력 약화
랑고바르드족과 프랑크족의 위협이 커지고, 성상 파괴 운동을 둘러싼 동서 기독교 간의 분열이 심화되면서 라벤나 총독의 입지는 불안정해졌다. 라벤나는 727년 성상 파괴주의에 대한 반란이 일어날 때까지 총독부의 수도였다. 라벤나의 마지막 총독 유티키우스는 751년 롬바르드족에게 살해되었다.[1]752년, 펜타폴리스 공작령으로 알려진 총독령의 북동부 지역은 롬바르드족의 아이스툴프 왕에게 정복되었다. 4년 후, 프랑크족이 롬바르드족을 몰아낸 후, 교황 스테파노 2세가 해당 영토를 주장했다. 롬바르드족에 대한 군사 작전에서 교황의 동맹국이었던 프랑크 왕국의 피핀은 정복한 땅을 교황청에 기증했고, 이는 피핀의 아들 샤를마뉴가 774년에 확정하면서 교황의 세속적 권력의 시작을 알리는 성 베드로의 유산이 되었다. 그러나 이전 총독령 내의 대주교는 지역 세속 권력과 독립에 대한 전통을 발전시켰고, 이는 권력의 분산 및 지역화에 기여했다. 3세기 후, 이러한 독립은 독립적인 코뮌의 부상을 촉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1]
나폴리, 칼라브리아, 풀리아의 제국 영토를 포함한 총독령의 남부 지역은 이탈리아의 카테파나테로 재편성되어 바리에 본부를 두었다. 이 영토는 847년 사라센 베르베르족에게 빼앗겼지만 871년에 되찾았다. 나중에 시칠리아가 아랍인에게 정복된 후, 잔존 세력은 새로 설립된 군사/행정 구역인 칼라브리아와 롬바르디아로 편입되었다. 아드리아 해 북단의 이스트리아는 달마티아에 부속되었다.[1]
5. 라벤나 총독부 이후의 이탈리아 반도
랑고바르드족이 이탈리아반도 내륙을 장악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세력은 로마 공국, 베네치아, 칼라브리아 공국, 나폴리 공국 등 해안 도시로 제한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에 획득했던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영토는 랑고바르드족에 의한 라벤나 총독부 멸망과 교황의 동로마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으로 인해 거의 대부분 상실되었다. 라벤나 총독부 멸망 이후, 나폴리와 칼라브리아 등 남부 이탈리아 (마그나 그라에키아)의 잔존 동로마 제국 영토는 바리의 카테파노가 통괄했다. 9세기에 시칠리아가 아랍인에게 정복되자, 이 지역은 테마 칼라브리아와 테마 롬바르디아로 재편되었고, 아드리아해 북안의 이스트리아는 달마티아에 편입되었다.
5. 1. 교황령의 성립과 프랑크 왕국의 개입
6세기부터 7세기에 걸쳐 랑고바르드족과 프랑크족의 위협이 증가하고, 성상 파괴 운동을 둘러싼 로마 교황과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대립이 깊어지는 가운데, 그 사이에 있던 라벤나 총독부의 입장은 더욱 불안정해졌다. 황제 레오 3세는 라벤나 총독 파울루스에게 중세에 저항하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를 살해하거나 투옥하라고 명령했지만, 파울루스는 이에 실패하고 727년에 그레고리우스 2세가 선동한 반란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에우티키우스가 뒤를 이었지만, 751년 랑고바르드 왕 아이스톨포에게 멸망하여 라벤나 총독부는 소멸했다. 이는 동시에, 황제와의 대립을 심화시키고 있던 로마 교황의 자립을 의미했다.[1]교황 스테파노 2세의 요청을 받은 프랑크 왕 피핀 3세는 756년에 랑고바르드 왕국을 격파하고, 구 라벤나 총독령을 동로마 제국에 반환하지 않고 그대로 교황에게 기증했다. 이 피핀의 기증은 774년에 랑고바르드 왕국을 멸망시킨 카롤루스 대제에 의해 확대되었고, 여기에 교황령이 성립되었다. 단, 라벤나 대주교는 동로마 제국 이래의 라벤나에서의 특권과 독립 교회의 지위를 유지했다.[1]
5. 2. 롬바르드 왕국의 멸망과 분열
프랑크족과 랑고바르드족의 위협이 커지고, 성상 파괴 운동을 둘러싼 로마 교황과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사이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그 사이에 있던 라벤나 총독부의 입지는 더욱 불안해졌다. 황제 레오 3세는 라벤나 총독 파울루스에게 중세에 저항하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를 살해하거나 투옥하라고 명령했지만, 파울루스는 실패하고 727년에 그레고리우스 2세가 선동한 반란군에게 살해되었다. 에우티키우스가 뒤를 이었지만, 751년 랑고바르드 왕 아이스톨포에게 멸망하여 라벤나 총독부는 사라졌다. 이는 동시에 황제와의 대립을 심화시키고 있던 로마 교황의 자립을 의미했다.교황 스테파노 2세의 요청을 받은 프랑크 왕 피핀 3세는 756년에 랑고바르드 왕국을 격파하고, 구 라벤나 총독령을 동로마 제국에 반환하지 않고 그대로 교황에게 기증했다. 이 피핀의 기증은 774년에 랑고바르드 왕국을 멸망시킨 카롤루스 대제에 의해 확대되었고, 교황령이 성립되었다. 단, 라벤나 대주교는 동로마 제국 이래의 라벤나에서의 특권과 독립 교회의 지위를 유지했다.
랑고바르드족에 의한 라벤나 총독부의 멸망, 그리고 교황의 동로마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으로 인해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에 획득된 동로마 영토 이탈리아는 거의 대부분 상실되었다. 총독부 멸망 후, 나폴리나 칼라브리아 등 남부 이탈리아 (마그나 그라에키아)의 잔존 동로마 제국 영토는 바리의 카테파노의 통괄 하에 들어갔다. 9세기에 시칠리아가 아랍인에게 정복되자, 이 지역은 테마 칼라브리아와 테마 롬바르디아로 재편성되었고, 아드리아해 북안의 이스트리아는 달마티아에 편입되었다.
5. 3. 동로마 제국의 잔존 세력과 남부 이탈리아
랑고바르드족이 내륙을 장악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세력은 로마 공국, 베네치아, 칼라브리아 공국, 나폴리 공국 등 해안 도시로 제한되었다. 라벤나 총독은 아펜니노 산맥 동쪽을 통치하는 황제의 대리인이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두쿠스나 마기스트리 밀리툼이 더 큰 권한을 가졌다. 명목상으로는 이탈리아 반도 전체가 총독부 관할이었으나, 시칠리아는 자체 정부가 있었고 코르시카 섬과 사르데냐 섬은 아프리카 총독부가 통치했다.랑고바르드 왕국은 피에몬테, 롬바르디아 등 이탈리아 북부와 내륙 지역을 장악했고, 640년에는 리구리아에서 동로마 제국 세력을 몰아냈다. 베네벤토 공국은 나폴리나 칼라브리아의 제국 영토를 잠식했고, 로마에서는 교황이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라벤나 총독부가 멸망한 후, 남부 이탈리아에 남은 동로마 제국 영토는 바리의 카테파노가 통괄했다. 9세기에 아랍인이 시칠리아를 정복하자, 이 지역은 테마 칼라브리아와 테마 롬바르디아로 재편되었고, 이스트리아는 달마티아에 편입되었다.
6. 라벤나 총독 목록
이름 | 재임 기간 |
---|---|
데키우스 | 584년–585년 |
스마라그두스 | 585년–589년 |
로마누스 | 589년–596년 |
칼리니쿠스 | 596년–603년 |
스마라그두스 | 603년–608년 |
요안네스 1세 | 608년–616년 |
엘레우테리우스 | 616년–619년 |
이삭 | 625년–643년 |
테오도르 1세 칼리오파스 | 643년–645년 |
플라토 | 645년–649년 |
올림피우스 | 649년–652년 |
테오도르 1세 칼리오파스 | 653년 – 666년경 |
그레고리우스 | 666년경 |
테오도르 2세 | 678년–687년 |
요안네스 2세 플라틴 | 687년–702년 |
테오필라투스 | 702년–710년 |
요안네스 3세 리조코푸스 | 710년–711년 |
스콜라스티쿠스 | 713년–723년 |
파울 | 723년–727년 |
유티키우스 | 727년–752년 |
사료에 따라 임기는 다를 수 있다.
참조
[1]
서적
Historia Langobardorum
[2]
서적
The Lombard Invasion
[3]
서적
Chronicle
[4]
논문
Pavia and Rome: The Lombard Monarchy and the Papacy in the Eighth Century
[5]
서적
Historia Langobardorum
[6]
서적
The Lombard Invasion
[7]
서적
Chronicle
[8]
논문
Pavia and Rome: The Lombard Monarchy and the Papacy in the Eigh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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